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야기 끝에 누가 강도 당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는 것은, 먼저는 강도 당한 자의 자리에서 어떤 이웃을 기대하고 있겠는가 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마리아인과 같은 돕는 이웃을 기다리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웃은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항상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씀인 셈입니다.
우리가 가진 질문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은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겠습니까? 선해 보이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그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결국 이웃이라는 말은 어떤 제한이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인 셈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 라는 말에 긍정을 하는 사람에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질문해야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슬픈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 뿐입니다. 은혜가 깊어 갈수록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갈수록 미워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문제도 그 안에 있습니다.
누가 이웃이냐를 묻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도 그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 어려움을 당한 이가 내 이웃이기 때문에 돕는다는 생각이 있었을 리는 만무할 것이고, 강도 당한 사람도 그 도운 사람이 내 이웃이기 때문에 도왔을 것이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돕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는 그런 것입니다. 이웃의 관계는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만드신 사람에게 허락하신 구원이 은혜인 이유도 그러한 것입니다. r2luke10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