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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시는 하나님

큐티

by jeffreyM 2022. 2. 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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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소식은 이전에 구약의 수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고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구원자에 대한 것이었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메시야 되심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이해하도록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죄의 문제로만 이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 과정에서 언급하셨던 구약의 말씀들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예수님도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받을 것을 아셨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고, 경험도 없는 우리 문화 가운데에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이 되신다는 도를 믿는 일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더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은 지식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만약에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로 부터 이고, 예수님이 그 관계와 사람의 실제적인 회복을 약속하셨다면 사람이 절대 포기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안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깊어가야 하는 묵상이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아무리 다양하고 작아 보여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나,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 눈을 뜨게 해달라고 소리지르던 소경,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성경을 이야기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충분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월이 많이 지날 수록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일은 그래서 그 동안에 삶 가운데서 익숙한 책임이나, 보상이나, 의무나, 투자의 결과 같은 가치들과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를 구하는 일은 오히려 좁고 어려운 길, 손해보는 길을 선택한다는 느낌일 때가 많고, 수 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을 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남겨주신 흔적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되심에 대한 인정과 사람이 가진 다른 고집스러운 소원함이나 신념을 내려놓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중에도 개인적인 신념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성취에 대한 바램을 하나님이 도우셔야 하는 일로 생각 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고 돌아와서 기뻐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라는 말을 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모두 흩어져서 대부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날까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시대에 믿음을 갖는 일도 그것이 아무리 강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했더라도, 아니면 여러서 부터 익숙한 믿음의 내용이었든지, 한 순간에 주어지는 어떤 것, 그런 변화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끊임없는 질문과 묵상, 갈등과 기도를 통해서 주신 삶에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만드신 세상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극적인 변화들은 그것이 갖는 장점이 있을 수 있음에도,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나의 어떠함에 찾아오셨는지를 놓칠 수가 있어서, 먹을 것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쫓아다녔던 군중들처럼 오히려 더 가난하고 무지한 자리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삼년의 세월동안에 제자들 안에 만들어져 갔던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은, 누가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풍성함으로 전해져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이유가 이 복음서의 기록으로 남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강한 나라의 속국으로 있던 유대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시고, 사람 가운데서 사시다가, 짧은 삼년의 세월만을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시다가 권력자들의 눈밖에 나서 잡혀 죽으셨는지 우리의 생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화려한 등장도 강한 세력으로서도 아니라 사랑으로, 그 막힌 담을 죽음으로 치르시고,  부활하셔야 했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절망 끝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시는 대속의 자리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제는 회복과 소망의 자리, 내 생명의 귀함을 알고 이웃의 귀함을 알도록 그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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