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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어디서부터 어긋난걸까?

사람 그리고 하나님

by jeffreyM 2026. 1. 2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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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한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진리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태도로 질문하는가에 따라서 그 대화는 아주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할 때에, 그 사람이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현재의 있는 자리가 어떠한가에 따라 신앙은 전혀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과 평생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사람이 가진 문화적 배경이나 정서적인 배경에 따라 믿음은 다양하게 이해되기도 합니다. 믿음의 이야기는 내가 소유하게 되는 기술이나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사람이 소망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들도 아닙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혹은 기독교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라고 검색 하면, 기독교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정의들, 신앙이 시작되는 그 자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명료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그러한 짧은 내용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에 사람이 익숙해 있는 신앙의 내용과 교회에 대한 이해가 그 기본적인 정의에서 부터 어긋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할 여지가 우리에게는 없어 보입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현실 가운데에 겪게 되는 대부분 갈등의 본질은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신학의 문제도 아니고, 사람의 고집스럽고 무지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잘못한 내용이나, 심지어 잘못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그 이웃과 지인들에게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사건에 대해 충분한 정보가 있어도, 객관적인 평가나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부분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에 그 판단은 대상이 무엇이든간에 왜곡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기도 하고, 어떤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한번쯤 그 자리를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상과 기준, 그 목적과 추구함의 대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외의 것들이 더 우선시 된다면 신앙이란 삶의 부수적인 한 부분의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복음을 공유하고 그 내용을 함께 고민하고 삶에 채워가는 역할로서의 교회가 아니면, 교회는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사람들은 그 변질과 왜곡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는 변질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유용함이나 능력이 더 강조되는 만큼, 그 속사람의 회복 문제는 질문하지도 않고 질문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문화와 시대는 대개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한 것들을 더 자주 묻습니다. 사람의 진리에 대한 마음은 진심일까? 사람이 실상 찾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겠는가? 사람이 어떤 절망을 지나갈 때에 혹은 깊은 회의를 경험할 때에, 그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다면 그의 삶은 궁극을 향한 회복과 변화의 약속이 주어져 있지만, 우리시대는 절망 중에도 그런 것들을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 답할 수 없는 교회에서 말하는 진리는 위안이나 편리함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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