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보면 어울리지 않는 듯한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자기 자식을 제물로 드린다든지, 나그네를 위해서 딸을 내어 놓는다든 것과 같은 고대 근동 지방에 있던 이방의 풍슴들입니다. 그러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멈추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이야기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갈수록 사람안에 믿음의 내용이 쌓여갑니다. 무엇이 구체적인 방향이나 내용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애굽의 문화에 익숙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받은 십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두가지 내용에 있습니다. 십계명에는 지금 우리시대에 받아들여지기에, 우리의 정서를 고려하더라도 너무나 당연한 내용들처럼 보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화해의 지속을 위해서 제사의 내용이 생겨나지만, 그것이 사람의 행위에 대한 치르는 대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과의 사이에 화해를 원하시고 요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사람의 행위가 초점인 이방인의 풍습이 등장할 때에 우리가 멈추고 다시 읽어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방법에 영향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내용을 표현하는 의식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사사들의 이야기를 지나면서도 그것을 확인합니다. 오히려 더 악해진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기도 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일 자체가 삶의 작은 한 부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이방신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기는 일들도 일어나지만 그 끝인 듯한 이스라엘의 명맥을 하나님이 그 배경에서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읽는 중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신명기의 유언과 같이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사기에서 잠깐씩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들이 위태위태하게 유지되었던 이스라엘의 믿음을 볼 수 있게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내용이나 모세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내용은 오히려 단순해 보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어떤지경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암시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자세한 요구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행위의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유지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내용들 입니다.
구약의 사건들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웃 이방인들처럼 특별한 행위를 통해서 의도를 증명하라는 요구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물질적인 복을 부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떤 행위가 조건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이 사람의 주가 되시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일을 알아가야하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큰 재앙들로 항상 이방민족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실 수도 있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내벼려 두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을 당하거나, 가뭄이 들어서 이집트로 가야하는 일 자체가 없게 하실 수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설령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람으로 선택하고 하시고, 사람은 빗나간 선택들들의 결과를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우리의 언어 안에 토속적인 정서를 통해 갖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그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고, 사람편에서 그 초월적인 존재의 관심을 유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갑작스럽고 신기하고 특별한 것들로 우리 안에 이해됩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우리 믿음의 일은 지속적인 삶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어떤 순간들이나, 행사같은 것으로 자주 이해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 라고 말하는 의미도 그렇게 되고, 믿음과 관련된 우리가 익숙한 표현도 그러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은 또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 다는 약속은 어떤 순간이나 일어나는 어떤 특별한 일로서가 아니라, 모든 순간들 중에 함께 있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모든 순간에 구원을 대하는 마음이 두렵고 떨림이 되는 것이고, 동시에 자유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특별한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시지만, 그것은 대개 위험이나 어려움으로부터 사람을 지키시거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기 위함이었고, 예수님 시대에는 어떤 표적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의 이적 후에 예수님은 배부른 까닭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보면서 영원한 떡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병자와 다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고, 죽은 자들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이적은 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항상 영원에 대한 것, 좋은 소식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눈먼 자, 못 걷는 자, 나병환자, 듣지 못하는 자들이 치유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과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온전함의 회복, 영원함 혹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의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만약에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라고 말을 하면 열심히 기도한 것이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요구에 대한 응답이나 소원에 대한 성취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새생명의 배경에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안에서 추구하는 것들도 보기에 구별되는 어떤 특별한 것들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한 소유나, 치유나 성공과 같은 것으로 그 내용이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들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경시되기도 합니다.
기드온이 두려움가운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 두번 다른 방법으로 아침 이슬의 표적을 구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제물과 제단 시이에 불을 내려주실 것을 요구한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시는 분인데도 우리는 마치 표적이 있어야 하나님의 계심을 확인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표적을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도 우리의 믿음이 깊이와 너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시대에 근동지방에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에는 과거의 어떤 역사안에서 일아나는 사건이 얽히고 연결되어서 미래에도 영향을 준다는 관점이 (Omen Mentality)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과거의 역사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서, 어떤 징조들이나 표식들을 구하고 연구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관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신 것이 이스라엘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것도, 권선징악의 원리도, 나와 조상의 어떤 행위가 나의 행불행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성경적인 관점은 아닙니다.
사람이 특별한 시간이나 특별한 사건들을 통해서 믿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가난함의 증거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없으면 사람은 다른 열심이나 특별함으로 그 내용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문제는 평생의 일이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것으로 믿음의 내용을 대신하기도 하고 사람의 가치를 대입시켜서 위로를 삼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 속사람을 보게하시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믿음의 내용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시작된 우리 믿음의 이야기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우리 매일의 고민과 노력들 중에서 조금씩 깊은 것이 되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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