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가까운 경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른 이해와 관점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굳이 죽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도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어려움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긍휼함을 다른 차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이시고 존재하는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시간이라는 것 안에서 느낌과 계획과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하셨고, 사람에게 영원을 갈망하고 영원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해하고 살아가는 일을 사람에게 심어 놓으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지켜야 할 어떤 명령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잊혀진 것,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할 것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이웃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잃어 버린 것들에 대한 회복, 사람이 잃어버린 자리에 대한 회복,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일을 알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자리로 가는 일 말입니다. 포도원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는 알았지만, 그의 마음과 그의 의지는 자신의 대답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에게는 포도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의 대답은 부정적이 었지만 가기를 선택합니다.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은 포도원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아버지의 그 필요가 아들들에게 시간을 통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회복하시는 일은 단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일도, 순종하는 아들이 되는 것 자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회복하십니다. 건강한 나무의 열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일이나 순종하는 일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회복의 결과들입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출애굽만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정의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이 이스라엘 회복의 어떤 최종 목적지도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얼마되지 않아 그것의 큰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건들은 그다지 겹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이전 세대를 기억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대한 사건들의 틈에서 그것들을 경험하는 세대이든지 이스라엘은 세월을 보내면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보입니다. 거기서 지속적으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일하심 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자신이 기억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며 이스라엘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모세의 간구의 내용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억들로 충분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죽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과 만물에 대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구하는 세월이 쌓여가는 중에, 사람이 감각할 수 있는 인생의 작음과 영원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알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나를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조금씩 가능해 지는 것이고, 그 포도원 주인의 작은 아들처럼 돌이켜서 포도원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함을 있게 한 하나님의 창조는 설령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없어지는 것, 존재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삶이란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 창조하신 세상을 사람에게 주시고 정복하고 다스시라는,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그 명령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알아가며 누리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