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거나 평가하는 일이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하는 일이나 기뻐하는 일과 그다지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이고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음을 이야기 하는 말씀의 배경에는 항상 사람이 있어야 하는 자리,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포도원에서 일할 품군을 구하는 주인의 약속한 대가가 아침에 온 사람이나 오후에 온 사람이나 끝날 무렵에 온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각 사람에게 별도로 약속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먼저 온 사람은 그 공평하지 못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의 원망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만약 얼마나 일했는가와 상관없이 동일한 삯을 받을 줄 알았다면 사람은 포도원에 일찍 일하러 가지 않았을 것같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생각하는 더 나은 방법입니다.
천국은 포도원의 일꾼을 구하는 주인의 이야기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 혹은 얼마나 많이 일했는가에 초점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일꾼에게 그 이야기의 초점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한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에 대해 갖게 되는 생각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짐작되는 반응과 비슷한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 안에서 그와 동일한 질문들을 합니다. 더 일한 사람이 더 받아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배우게 되는 다양한 방법들과 원칙들과 가치들은 분명히 귀한 것이지만, 사람이 천국을 이야기 할 때에 그 가진 지식과 가치들이 천국의 내용이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더 많이 오랜시간동안 일한 사람이 잠깐 와서 일한 사람과 동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될 수 있습니까? 아직 세상도 모르는 아이들과 같아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까? 천국이라는 뜻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임금의 비유처럼 데나리온, 사람이 갖게 되는 기준이나 평가하는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막 태어난 아기들의 하나님이시고 노인들의 하나님이시고, 유대의 하나님이시고,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고, 온갖 문명의 것들로 가득한 도시 사람들의 하나님 이시고 아직 기본적인 삶의 필요만으로 충분한 외딴 마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이야기는 사람에게 비교하거나 평가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전, 세리 옆에서 기도하던 바리새 사람의 기도에 그 비교가 있습니다.
쇠사슬에 묶여서 예수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바울, 감옥에서 찬양할 수 있던 제자들, 죽음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순교자들에게 있었던 것이 그 천국의 이야기입니다. 쇠사슬이나 감옥이나 죽음과 같은 극한 상황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있는 천국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감옥이 있지 않아도, 묶여 있지 않아도 죽음을 직면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항상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일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어떤 성취의 순간들이나 만족할 만한 수준과 같은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바울사도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아가는 일은 평생이 걸리는 일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람의 사람됨에 대한 확인과, 그래서 깊어가는 은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그 믿음의 경주를 합니다. 그것이 부자 청년의 근심에서, 누가 큰 자인가를 묻던 제자들에게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천국에 대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우리가 보고 배우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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