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번씩 일곱번은 사백구십이라는 숫자를 말하는 것도, 많이 용서해야 한다라는 뜻도 아닙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조건적인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의 원칙을 배워가는 중에 알게 되는 것은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추구보다, 타협하는 일이나 유익을 위해서 다른 가치들을 상대화 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지는 가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우정이나 배려와 같은 가치들은 이미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일에 익숙해 지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생명과 삶의 귀함을 알아가는 일에 가장 큰 아픔과 장애가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새 생명의 열매들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필연에 대한 것입니다. 새생명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런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약함으로 인해서 회복의 흔적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에 대한 타협의 여지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가 어떤 사랑인가 그리고 일그러진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확인하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새 생명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자랑이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자랑이란 사람이 성취하고 이룬 것들에 대한 확인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일, 허락하실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바울사도가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거룩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용납하시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사라는 조건으로 사람을 용납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 되심을 걸고 열어두시는 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거룩하심을 거스리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제사를 통한 약속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허락하여야 하는 크신 하나님의 대속이 있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만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수십만불의 일에 해당하는 작은 빚을 탕감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자들은 내게 잘못한 형제를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용서의 문제를 정도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자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라고 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진 은혜의 문제를 정도와 수준의 문제로 이해하는 한 사람은 그 괜찮은 수준이나 용납되어지는 수준이 존재한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어느 자리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의 사건, 그 은혜의 사건은 이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괜찮은 사람이야기 쯤으로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라는 말씀은 일곱번, 사백구십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그 절대적인 회복의 자리, 사람이 받은 은혜란 어떤 것인지, 사람에게 허락된 새 생명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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