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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 ..

큐티

by jeffreyM 2022. 3. 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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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말은 실제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탐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답을 하신 것 뿐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무엇을 하느냐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전통 중에 있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고 거기에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그들의 신이시며 그들의 삶과 역사중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함의 슬픔에 대해 예수님은 자주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에 대한 다른 이해를 구하지 못하고, 그들이 현재 위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대조한 것은 그것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셨던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대처럼, 그리고 우리의 기대처럼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당한 어려움을 해결하셔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이집트나 로마를 왜 있게 하시고 가이사를 왜 허락하시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어려움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그 사람 편에 있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사람을 그 중심에 둡니다. 위의 질문들이 그런 것입니다. 사람에게 유익한가를 묻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무지함이나 이기심으로 생겨난 어려움일 수 있는데도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고, 우리의 많은 행위와 선택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단절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사람은 사람안에 있는 죄악된 속성, 부조리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사람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분함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거기에 대한 끊임없이 회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장 고상해서 다른 것을 오히려 해로 여긴다는 바울의 편지에서 그가 이전에 가진 많은 지식이 상대적으로 비교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의적인 반응보다, 지적인 혹은 감정적인 확신보다, 크신 분임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믿음을 갖게 하는가 혹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떻게 일하시게 되는가하는 것는 여전히 어려운 질문들입니다. 

로마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가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맞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오히려 악한 의도의 질문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어떻습니까?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우리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가는 곳, 소속된 어떤 곳이 우리 신앙의 영역이 아닌 곳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과 선행을 행하였으나,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방법이 없었던 젊은 관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자되심에도 불구하고 젊은 관리의 인간적으로 완벽하게 지켜왔다는 그 삶이 궁금합니다. 어떤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삭개오의 기다림과 그의 결심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신 계획에 대해서 짐작하게 하지만, 그가 살아오면서 채웠을 욕심이나 행하였던 악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에 대한 조건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세를 받으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종들을 능욕하고 이후에 보내는 아들들을 죽여버립니다. 오래 포도원을 지켜왔어도 여전히 농부는 포도원의 주인은 아닙니다. 유대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다르게 느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가운데에 소중한 것들이 생길 수도 있고, 편한 위치나 자리,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생겨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이제 가치를 대신하는 가이사가 새겨진 돈이나, 어려서 부터 잘 지키고 행하여 왔던 나의 나됨에 대한 자랑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서로에게 질문하는 것 마저도 신앙과 한 개인의 소유에 대한 선택이나 비교에 대한 것들일 때가 있고, 사람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대조해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항상 함께 계시며, 비교하고 판단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가이사가 새겨진 동전으로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초라한 것이 되어져 있는 지에 대한 반증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은 항상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고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 일의 주인이 되어주실 것에 대한 기대와 기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질문들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그 지도자들처럼 사람을 판단하고 해하기 위한 것들에 우리의 생각을 내어주게 됩니다. 가이사의 것으로 예수님을 고소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내용이 아닌 것으로 내 이웃을 또 지체들을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로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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