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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달리보이는 것

by jeffreyM 2024. 12. 1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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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위해서 삶을 투자할까? 당연하지 않은 질문이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사람이 추구하고 공감했던 많은 가치들은, 그것을 위해서 사람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다른 선택보다 우선이 된다고 하는 전제가 있었다.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가치로운 것인가를 이야기하면서 그것과 상관없이 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누가 인생의 의미과 가치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그렇게 살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고 믿는 거다.
그런데 지금의 세대는 그렇지 않다. 어떤 지속될 수 있는 가치로서가 아니라 그 순간에 판단으로 가치로운 것이 결정되는 것이라서, 낭비도 실패도, 오류나 성공도 한가지로 이해되지 않는 상대적인 것들이다. 오랫시간을 통해서 노력하고 수고해야하는 것들에 대한 추구가 없고, 눈 앞에 보이는 것들로 충분하고,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거다.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믿음과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같은 가치들을 소중히 한다면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아무런 갈등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재미있는 삶을 살다가 죽음이 가까운 때에 믿음을 가질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구원이 은혜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논리가 딱히 틀린 것도 아니다.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사람에게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일의 배경에는 그러한 논리가 가능하게 한 우리 크리스찬들이 있다. 우리는 자주 마치 간단한 의식처럼,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오히려 살아 있는 동안 믿음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크리스찬이 믿음 안에서 얼마나 누리는가, 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함을 얼마나 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해 보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근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귀하다고 믿으면 그것은 분명히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한다. 나를 돌아서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자신의 고백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다른 어떤 성경과는 다르게 부정적이고 단정적으로 표현한다. 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재미있는 결과를 이야기하게 된다. 하나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이해, 필요로서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믿음이 있는데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하니 그리 해야겠다라는 태도 같은 거다. 두번째는 내가 가진 믿음을 전제하고 행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 행함도 해야지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거다. 이러한 이해가 해로울 수 있는 것은, 이 두가지가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둘은 따로 평가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나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서 이전에 내가 무관하던 일, 새로운 생명이 하는 일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잘 되지 않아서 사람은 죄된 속성의 심각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란 사람이 인식하는 것보다 거대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고백하는 것들이 삶의 배경에서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그래서 심각한 질문은 마땅히 사람에게 생명이 되어야 할 복음이 사람 안에서 소외되고 왜곡되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거기에 관심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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