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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곤고했던 사람

사람 그리고 하나님

by jeffreyM 2022. 2. 2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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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안에 있는 생각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예의라는 것으로 어떤 때는 체면이라는 것 혹은 전통이나 습관 같은 것도 나의 나됨과 관련이 없이 반응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 다른 상황이나 사건들을 대하면서 내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갈등이 되는 것은 여전히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 안에 있는 생각들을 모두 표현하는 것은 솔직하거나 진솔한 것이 아니라, 아무 배려함이나 주의가 없는 이기적인 것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변하고 아주 작은 한가지라도 온전한 이해를 갖게 되기까지는 평생이 걸리는 때가 많아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의 모든 걸러지지 않은 표현들은 나의 서투름이나 무지함을 듣는 사람이 감당하도록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으로서 가진 끊임없는 그 갈등을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 영의 일과 육신의 일을 대조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가 가진 반전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사람이 가진 곤고함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만나주시기 전에도 바울에게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는 한 사람으로 곤고함이 항상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고민은 항상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곤고함을 주는 갈등이 있는가 하는 것도 물어야 하겠지만, 사람이 스스로 가진 곤고함이 어디에서 오는가하는 것을 질문할 수 있다면 바울의 자유함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허락하시는 은혜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서 사람에게 곤고함이 있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그 생각이 사망으로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곤고함의 배경에 그가 속사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포함되어 있고, 그가 항상 “선함”을 원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법, 그가 삶을 이해하는 태도는 사람 안에 해결되지 않는 다른 법, 육신의 법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열심이 있어도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없는 이유, 그것으로 충분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 육신의 법이었습니다. 
사람이 설명하는 인생의 반전이란 대개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으로 옵니다. 이전에 선택했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업이나 사람이나 환경이나과 같은 것으로 찾아 옵니다.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는 반전은 그에게 해결되지 않았던 그를 곤고하게 했던 그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알게 된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고, 선하게 할려고 노력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곤고함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을 받았을 때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그를 만나주셨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충격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그의 평생에 그의 가슴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곤고함, 예수 그리스도로를 만남으로 인한 “생명의 법”은 그에게 그러한 삶의 반전을 가져옵니다.
복음은 사람이 잘못한 어떤 행위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육신의 법이고 그것이 바울의 곤고함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의도, 스스로에게 거리끼지 않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하는 속사람의 문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이스라엘은 못박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함을 구하던 바울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현실입니다. 사람에서 나온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것이 사람의 자리이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고 사람의 자리를 찾아 관계의 회복과 사람됨의 회복을 약속하신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주신 이야기(행3)는 특별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많은 말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보게 되고, 음식을 먹게 되고, 세례를 받고 강건하여 졌을 때에 그의 안에 생겨났을 많은 일들과 생각들을 그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죽음의 고비를 맞이 하면서, 수많은 고난들을 기꺼이 지나면서 죽음의 자리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사람이 사람안에 있는 부조리들, 다양한 갈등과 곤고함, 선함에 대한 구함은 있어도 되지 않는 악함과 욕됨의 원인을 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구원이 되십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사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 사람에게 생겨난 불온전함의 문제,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사람됨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회복하시는 분,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찾아오십니다. 

사람은 복음의 내용마저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더 괜찮은 사람, 더 자랑할 만한 사람, 더 나은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자리에 대한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그 사람의 자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내 안에 있는 곤고함을 해결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열매이건, 생명의 열매이건 사람에게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회복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내가 자랑할 일이나 내용은 없다는 고백이 그 사도에게도 결국은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소망과 구함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삶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r2luke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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