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랑을 돌이킬 때에, 가장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은 아무리 고귀한 감정이나 생각의 경험들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간직하고 귀한 것으로 가꾸어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익숙함은 그 대상을 평범한 것 이하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헤어진 그 상대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 비난은 정당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어떠함을 돌아보고, 그래서 어떻게 했었어야 했나를 묻는다면 답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인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또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그 모든 만남들 중에 끊임없이 확인과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들은 다양한 그 “운명과 같은” 만남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냈고 과정들을 겪었는지를 놓칩니다. 운명이라는 의미는 어떤 한 사건이나 시점을 의미하지 않고, 사건들과 시간들과 갈등과 어려움들과 같은 많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운명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에 만나는 것 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때 처럼, 사람의 영혼이 움직일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호기심과 의문들과 묘한 끌림 같은 것들이 그 신호들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표현을 만남의 시작에 사용하면 이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느낌일 수 있지만 굳이 말하자면 시간이 쌓여서 얻는 결론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최선을 구할 때에, 운명을 어떤 순간이나 사건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고, 내가 쓴 일기처럼 공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나는 나의 어떠함에 대한 이해와, 상대방의 어떠함에 대한 느낌들을 통해서, 그 관계를 운명처럼 느끼는 일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은 순간의 일은 아닙니다. 또 그것을 지켜나가야할 많은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관계가 피상적인 것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철이 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는 시점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때, 혼란스럽고,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점들입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모든 관계가 피상적인 것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도, 이벤트나, 선물이나 여행과 같이 많은 시간을 공유하면서도, 실제로 그 상대방의 속사람은 나누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마음을 열게 하는가, 무엇이 삶을 나누게 합니까? 내가 온전하지 않은 존재이고,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내게는 사소할 수 있으나 존중하고, 그 이야기에 열려 있어서 공감하려 하고, 나의 그것도 존중함을 받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전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사람의 가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그래서 서로 누군가 내게 마음을 나누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글쎄 흔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한 인간으로 평범할 수 있지만, 그를 다르게 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관점에서 그는 건방지고 잘난척 하던 막내 아들입니다. 형들 전쟁터에 와서 기웃거리다가 자기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떠들던, 그래서 그가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암시하는 것이었고, 그가 후에 범죄하고, 회개하고, 말련에 아들에게 쫓기면서 쓰던 많은 시편들이 오히려 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와 보이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견뎌온 사람들 중에 갖게 되는 배려와 기품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이들에게 사랑이란 또 많이 다른 의미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어떠함 밖에서, 그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사고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궁극적으로 나는 나의 어떠함을 곧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온전하지 않음, 나의 온전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주의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에게, 나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가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떤 기적보다 신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사람됨과 그 온전함의 회복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그 안에서 자라는 생명이 됩니다.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 것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나는 상대의 어떠함과 동일한 방향을 보고 걸을 수 있는 삶의 내용과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로서, 나는 나로서 삶을 최선으로 대하는 중에 , 다른 일어나는 세상의 일에 서로의 삶에 열려 있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러 언어로 표현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나됨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게 소중한 것들이 생겼을 때에, 혹은 내게 소중하던 것들이 멀어져갈 때에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더 심각하게 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