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우리들의 교회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고려하면, 우리 시대의 지역 교회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것과 믿음의 내용을 나누고 배워야 하는 교회는 다른 일들로 너무 바쁩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 안에서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찬양은 기술과 실력과 환경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기도는 삶과 관련이 없어도 거리끼지 않는 소리가 되어 있습니다. 찬양을 잘한다는 표현이나, 기도를 잘한다는 표현도 믿음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한 사람이 믿음 안에서 이해하는 삶의 원칙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해하는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을 정당화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의견의 차이나 생각의 차이를 악함과 선함으로 대조하기도 하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을 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크신 분인데도, 다른 생각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사람은 그 무지한 선택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아이처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똑 같은 말과 행동만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부조리로 가득한 사람을 회복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더이상 나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야기의 전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사람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목사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정의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사의 역할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는 성경구절들, 에베소서나 디모데 후서, 사도행전이나 히브리서 혹은 야고보서의 말씀들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전통가운데에 익숙한 지역 교회의 목사의 의미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 구절들에서는 교회의 리더들이 혹은 가르치는 자들의 역할이나 자세같은 것들을 언급할 뿐입니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통 가운데서 생겨나는 많은 귀한 가치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어야할 만큼 사람의 상태가 심각하다면, 말씀에 비추어서 빗나간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오래된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든 돌아볼 수 있고 또 돌이킬 수도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정서는 목사라는 사람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합니다. 슬프게도 우리 전통가운데 토속신앙이 가진 맹목성과 비슷합니다. “주신 삶에 주의 하고, 그래서 존경받는 우리 동네의 믿음의 형제”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겠지만, 그 신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신뢰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믿음 안에서 겸손이라는 것도 하나님 앞을 전제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세우지 않는 것 쯤에서 멈춰있습니다. 실제로 설교중에 사람이야기도 우린 자주 듣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지역교회는 제도와 전통 안에서 세워집니다. 그래서 매순간 주의하지 않으면 빗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권고하고 조언할 수 있지 않으면 사람은 거의 그렇습니다.
그러한 제도적 교회 안에서 배우고 익숙한 우리들입니다. 교회 언어와 표현에는 너무나 익숙한 만큼 묵상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멀리서 공유되지 않는 자리에 멈춰 있고, 믿음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결과들에 대한 소원 쯤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도전을 받고 더 깊은 이해로 가게 되는 것은 내게 불편한 사건들이나 관계들이 있을 때 입니다. 그 것을 믿음 안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경지가 넓어지고 더 많이 사랑하는 법과 더 큰 사랑을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신념과 믿음은 다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를 기억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 가진 신념이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작은 것입니다. 내려놓아졌어야 할 일입니다. 청년과 노인의 믿음, 남자와 여자, 지식이 많은 사람과 이제 배움을 시작한 아이들의 믿음, 현대 문명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과 제한된 정보를 가진 환경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들을 내가 힘을 다해 지키려 할 때에 하나님과 이웃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유에서 잘했다라고 칭찬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성취나, 주인에 대한 그 개인의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더 열려 있게 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들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너무 멀리 와 있고, 우리 교회는 거기에 너무 익숙합니다. 이집트에 익숙한 이스라엘의 사십년 광야가 필요했다고 이해하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씀과 묵상으로 하나씩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가진 신념과 노력도 돌아보아야할 것이고, 내가 가진 믿음의 내용도 묵상을 통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쌓이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사와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웃을 더 사랑하고 온전함의 길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