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은혜
사람이 무의식중에 추구하는 평안함 같은 것이 있습니다. 충분한 소유나, 원하던 것들의 성취나, 안정된 지위들이 그 내용 안에 있기도 합니다.
사람은 우주가 여전히 팽창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아내기도 하고, 우리 사람들과의 관계들 마저도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평안함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는 상태나 조건이나 위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임을 조금씩 짐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의 내용들도 방향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경지나 수준, 깊음이나 자격에 대한 것과 같이 우리가 잴 수 있거나 인지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이야기하는 이가 수준을 이야기하거나 자격을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들리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에게 생겨나는 것들, 내 말이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이후에 사람 안에 일어나는 일로 인해서 사람은 그 믿음의 내용을 추구하게 됩니다.
물론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내면의 소리를 의지적으로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안에서 들리는 어떤 소리들은 점점 더 작아지기도 하지만, 신앙 안에서도 가끔 오랜 세월 이후에 가려진 소리들을 다시 듣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간증들을 듣는 일은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로 했어 라는 신앙 고백 때문에 우리가 보여줄 만한 어떤 내용들은 사실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나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표현들은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거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가장 감각하지 못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에게는 분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내용들에 대한 하나님편에서의 선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하셨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끊임없이 사람 안에서 그 증거를 찾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선언이므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이 우리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기본적인 내용을 지킬 수 없는데, 더 심각하게는 요구하시는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것 같은데 사람의 구원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도 하지만, 가나안이 하나님 약속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약속은 사람이 상태나 능력, 자질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을 따라 애굽을 나오고, 사십년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전쟁들이 지나고 사사들을 세워지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 선택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곁에 여전히 계신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향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한 영원을 향한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평안은 그 약속하신 최종의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외로 사람이 소유하는 것들이나 성취한 내용들이 사람을 부패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사람이 끊임없이 원하고 구하는 되는 일은 하나님이 사람안에 시작하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태도가 죽음처럼 힘들 때를 지나거나, 오랫동안 지병을 앓거나, 어떤 때는 아무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세월이 반복 될 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하나님은 나를 그 약속하신 곳으로 데려가실 것이라는 사실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원인을 제공해야 결과가 주어지는 일도 아니고, 자격에 맞는 행동을 해야하는 일도 아니고, 선택에 대한 보상의 이야기도 아니고 항상 은혜를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자격이나, 수준이나, 업적이나, 행위의 조건이 없어도, 하나님이 그 길을 약속하시고 우리를 완성하신다는 그 약속 안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완성해 나가는 계획, 혹은 우리가 이력서에 써 넣을 수 있는 내용이 많아질 수록 주의하고 돌아보아햐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내용은 그보다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음이나, 내가 지킨 약속이나, 내가 선택한 그 선택과 그다지 관련이 없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그 은혜의 일입니다.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를 만난 그 사도가 죽음의 순간까지 전도자로 살면서도, 그 모든 위기와 위험과 평안할 수 없는 그 시간들의 반복됨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평안을 묻고, 마치 큰 빚진 자처럼 감옥에서 기도하고 부탁하고 간구하는 그 배경이 하나님이 하신 은혜의 일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그 내용을 만들 수가 없음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자들을 괴롭히고 처벌하던 전통 유대인이었습니다.
별다르지 않은 일상 혹은 일상이기에는 너무 힘겨운 오늘도 우리가 감사하고 평안으로 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그 은혜의 약속 때문입니다. 오늘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