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뒤에 숨어서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거야
좋은 것들을 알게 되고 우리는 규칙이나 습관들을 만드는 거 같아. 어떤 것이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규칙을 만들어서 라도 지키고 싶어하거든.
내가 살면서 만들어온 많은 규칙들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그 처음에 그것을 시작하게 한 내용이 함께 있어야 하는 거 같아. 내용과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규칙들은 쉽게 변질되기도 하거든. 이스라엘이지켜야 하는 율법들만 남아 있던 것은, 그래서 슬픈 거지. 그 때에 이스라엘은 율법만 지키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야. 충분히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겠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실 때, 메시야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고소하던 많은 내용들이 그 "율법"에 대한 것이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키고자 만들고 지켜왔던 그 내용들로 하나님을 고소하는 거야. 하나님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율법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용되는거야. 그것 때문에 메시야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 귀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습관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일까? 아님 습관과 관계 없이 우리는 그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못박은 사실에 대해서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마땅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었을 거야. 그것이 우리 모두가 서 있기 쉬운 자리이기도 하구.
우리의 익숙한 습관은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를 얽메고 오히려 우리를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아. 우리의 예배가 그렇고,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이 그래.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습관 뒤에 숨어서 하나님 앞에 선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거야.
우리의 행위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우리가 서로에게 가진 관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 찾아온 구원과 회복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얽메이지 않는 자유와 온전한 사랑을 알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