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물 위를 걷다
왜 의심하였는가? 라는 질문은 의심하지 않았으면 계속 물 위를 걸었을 텐데라는 의미도 아니고, 의심하지 않았으면 물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다음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주시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놓치면 믿음이 좋다 혹은 믿음이 깊다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 기도의 대상이고 그 대상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를 놓치면 기도란 로마가 이름없는 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나 그다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의심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들과는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는가라는 질문은 좀 더 나은 수준에 대한 질문일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이 목적이었으면 의심하지 않으면 물위를 걸을 수 있다. 혹은 물 위를 걸으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방법의 문제로 이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의 문제는 거기에 없습니다. 실상 복음서의 기록에서 보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살았던 지도자들과 지식층들도 오히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보였습니다. 이후에 복음서들이 제자들의 기억에 의해서 다시 기록되고 증인들의 증언으로 다시 기록이 될 때에, 비로소 제자들도 무리들도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도, 그리고 제자들이 그 삼년동안에 경험하고 알게 된 사실들도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그 약속하셨던 구원의 일을 이루시는 커다란 이야기 가운데에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의심하지 않고 물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중간에 만나게 되었더라도 예수님이 오신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적이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혈루증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도, 백부장에게 이스라엘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씀도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치유들의 작은 예들일 뿐입니다.
폭풍이 몰아칠 때에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라고 표현하면, 폭풍이 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나 폭풍이 쳐도 사람은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갖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폭풍과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지나는 중에 괜찮은 결심 하나 했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삶에 찾아오는 폭풍으로 인해서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은 항상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겼다고 믿는 믿음은 쉽게 왜곡되거나, 하나님과의 회복되는 관계의 문제에 오히려 장애가 되기 쉽습니다. 사람의 경험이나 사람이 이해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욥의 세친구들이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사람이 구하는 일이나 원하는 일이 없을 때에 오히려 더 큰 온전함의 요구를 대하게 됩니다. 평온하고 휴식같은 날에 하나님을 구합니다. 고난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이 되었을 때에도 삶은 여전히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답해야할 근본적인 질문은 오히려 특별할 것 없는 그 날에 하나님은 우리 삶의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삶 자체의 문제라고 이해한다면 물위를 걷는 일 뿐 아니라 매일 다가오는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일상도 우리 믿음의 이해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성경에서 기록한 내용들만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전인격적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믿는 다면, 사건이나 행위나 결심이나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들 뿐 아니라 매순간의 결정이나 우리를 스치는 생각들도 포함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일입니다. 욥은 단지 고난을 잘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고난도 그가 가진 믿음의 내용 안에 있었을 뿐입니다. 고난을 대하고 지나가는 중에 끊임없이 그의 반응을 통해서 그의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친구들은 그 피상적인 이해들로 욥을 평가합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들의 욥에 대한 언어는 그들의 삶에서 무엇을 향하고 무엇을 이야기하는 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욥이 당하는 문제를 이해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인지 욥의 자백을 받고 싶어 합니다. 무엇이 그 친구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는가를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욥의 결국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욥의 경건함이 피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재앙 이전에도 이후에도 하나님과 대면하게 될 때에도 동일한 내용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나름대로 변명하고 설명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의 변명보다 크신 분이시고 그래서 그의 태도는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 이외에 행위나 눈에 보여지는 이유와 결과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에 우리는 피상적인 인생을 살게 되거나 아니면 피상적이어도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믿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다른 무리들도 베드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그 무지함과 어려움을 거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고 전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이르렀다고 말할 수도 없고,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믿음의 일입니다.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 충분한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란 항상 동적으로 현재를 대하고 끊임없이 모든 시간들과 내용을 포함하려는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 안에서 잠시 순간의 성취감이나 어떤 선한 행위들로 충분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요구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이해하게 되고 복음서들과 또 편지들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요구되는 답은 단순히 왜 물에 빠지게 되었는가의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물에 빠졌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베드로는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성급해 보이는 행동들 가운데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포함해서, 그가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서 있을 때도, 예수님의 세번 물으심에 대답해야했던 그 순간들을 포함한 모든 순간들에 요구되는 것이었고, 그 순간들을 지나 껍질을 벗게 되고 온전한 믿음으로 향하게 되는 그 이야기를 성경이 하나씩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