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고 하나님

욥 또 다른 복의 이야기

jeffreyM 2023. 11. 15. 11:04

정서적으로 욥은 이스라엘인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시대와 비슷한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약의 곳곳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욥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제 이야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지금 우리 시대의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과 다른 것은 분명하겠지만, 그가 하나님의 경외함과 하나님께 특별한 태도를 가졌다는 것이 욥기를 읽을 때마다 발견하는 놀라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동안 그의 겁많아 보이는, 그리고 항상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알아갑니다.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세심했으며 얼마나 능동적으로 움직였는가 와는 대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마지막 모리아 산에서 이삭의 사건을 통해서 인정을 받기도 하지만 신약에서 그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쯤으로 이해해야 할 정도로 그의 믿음의 이야기는 그의 행위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삭을 가질 때도 그의 긍정적이거나 적극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해 보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천사들과 사탄 앞에서 그를 자랑하고 테스트하는 것을 허용할 만큼 괜찮은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리 지금 시대와 문화와 정서가 다른 때라고 하더라도 그가 받은 테스트의 수준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절망스러운 것들입니다. 씨 에스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제럴드 싯쳐의 하나님 앞에서 울다라는 책들에서 사람이 당하는 절망들을 표현해 내는 저자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같은 슬픔이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상실감은 사람이 익숙하고 전제하고 있는 인생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 믿음 안에서 다른 의미와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이 당한 어려움의 크기의 거대함 만으로도 우리는 압도되기도 합니다. 그가 가진 상황을 공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한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도 자랑하셨던 욥의 구원의 이야기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커다란 그림이 우리에게 있는가도 우리의 큰 질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생각속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이라는 것이 상황의 해결이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개입이라는 것을 포함한다고 이해한다면, 욥의 이야기는 정 반대되는 상황,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고난 받는 것을 허락하신 사실은 우리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들이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어야 함을 이야기 합니다.
편안함이나 편리함이란 사람이 가지는 긍정적인 가치일 수 있지만 ,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고난을 지나는 사람들의 많은 간증들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고백들을 듣습니다.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인생을 보면서 그들의 인생과 과정을 하나님이 굳이 편안하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대개는 죽음의 자리들이 비참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의 자랑은 항상 사람의 기준으로 자랑 할만한 것들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마저도 사람의 자존심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마땅히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사람의 이야기는 다 이야기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거기에 함께 있습니다. 
욥기는 그 시작에서부터 족장시대에 살았던 참 괜찮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의 내용안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지식이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나서 주신 분도 하나님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그의 고백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혹 자식들이 부지중에 저지를 수 있는 범죄에 대해서 제물을 드렸던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과연 어느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절대적으로 기대하고 자신이 가진 수준과 기대가 상대적인 것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시대에 우리 인생을 통해서 하게 되는 믿음의 질문들 입니다. 
믿음의 이야기는 사람의 상식이나 성실함이나 노력의 문제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가진 기준으로 다른 이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대할 때에, 사람이 인생을 귀하게 여기는 만큼, 사람이 가진 가치나 원칙들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마저도 그것이 절대적인 원칙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다윗이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사울을 죽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도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는 것도 어떤 원칙이나 기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린 막연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배우고 익숙한 원칙에 따라서 선택하고 판단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이유가 있으므로 자신의 행동이나 언어가 정당화 되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 믿음의 문제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궁핍함이나 부요함에도 거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주신 삶을 어려움이든지 풍요함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영원이신 하나님. 욥의 고난과 어려움이 세상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욥의 인생에 일어나는 그일들을 허락하심을 보면서, 사람이 크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은 사람이 기대하는 어떤 사건의 진행이나 결말로 결론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속사람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다는 것, 욥이 그의 어려움을 지나는 중에 친구들과 내내 변명하고 고민한 후에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고백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라고 스스로를 부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원칙쯤으로 전락할 때에, 사람은 욥이 내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볼 수 없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그에게 어느날 다가온 재앙은 그냥 예외 적인 이야기 쯤으로 슬쩍 우리의 묵상을 지나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