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하나님에 대한 것
외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내적인 것이든지 간에 사람이 인정하기 시작하는 익숙하지 않은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생각속에서 허용하는 것들은 또 다른 것들을 허용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쌓여서 나의 삶과 나의 판단 중에 함께 있게 되고, 그것이 인생안에서 나의 격과 품을 갖게 합니다.
사람 안에 쌓여가는 지식과 내용이 많을수록 사람은 그 다양함과 사람 안에 가둘 수 없는 거대함에 대해서 알아가게 하겠지만,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가진 내용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시점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집으로 어떤 때는 관대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고착된 자리에서 사람은 가끔씩 도전이 찾아올 때에 스스로 가진 내용으로 그것들을 평가하거나 무시하기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많은 티비 쇼에서 어떤 분야의 뛰어난 사람이 등장할 때에 느끼는 통쾌함 같은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그 바람들, 사람이 소망하는 그 높은 수준과 능력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할 때 사람은 그 바람때문에 스스로와 이웃으로 부터 소외되기도 하고, 그렇게 못함의 열등의식 사이에서 아주 오래 길을 잃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하나님을 신앙하는 의미는 사람의 수준이나 경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씀도,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라는 말씀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 혹은 능력도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빗나가기만 하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붙들고 계시는가?라고 물을 때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사람 존재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의미를 그의 삶가운데에 얼마나 경험되고 이해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과, 하나님이 그 백성에 대한 관계가 어떤 것이며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습들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스라엘과 별반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 실제로 우리의 묵상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우리의 묵상들이 믿음의 조상들이 한 행위를 분석하는 것에서 머무를 때가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까 라는 방법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태도를 가질 때도 있고, 특별히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들의 인생을 본받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보여질 수 있는 어떤 수준을 갖고 싶어하지만 성경에서는 항상 보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사람,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에 포함되어 있는 의도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맹인과 나병환자, 죽은 자, 가난한 자에 대한 이야기로 대답하십니다. 그 이후에 “너희가 무엇을 보기위해서 광야로 갔느냐?”라는 질문으로 복음이란 힘있는 자나 권세있는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세월 중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크고,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많았다는 예수님의 역설이 또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묵상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내게 허락하신 구원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것을 생각속에서 허용할 때에 우리는 우리 가운데에 생겨나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또 다른 대답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일, 하나님이 사람을 회복하시는 일로 인해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확신으로 이해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떠함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어떤 믿음의 수준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작음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했고, 지식이 자랄 수록,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이 크신 분이라는 사실만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 앞에서 여전히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이란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있는 일로 충분히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갖게 되는 우리 안의 모습들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생을 다해 복음을 전하던 사도처럼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