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우리 믿음의 이야기
신앙의 이름으로 빗나간 것들, 잘못 이해한 것들은 우리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은 그걸 어떻게 보시는가? 우리시대에는 대개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들이 있고, 원하면 얼마든지 그 정보들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관심이 수많은 오해를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오히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그다지 그 내용들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구하는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나의 기준, 나의 절대적인 간절함이 있었으므로 충분할 수 있습니까?
내게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해가 될 것들이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에 사람은 사람이 가진 믿음과 사람이 감각하는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는 이루어진 것들에 대한 자랑이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유나 변명들을 만들어 가지 않는 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들과 사람이 구하는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울리는 꽹가리나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처럼 전혀 다른 믿음의 내용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믿음 안에는 자신의 신념이나 계획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이웃을 무시하거나 상하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강도 당한 자에게 이웃은 터부시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 되겠는가?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의외로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어라가 아니라 강도당한 자에게 제외 되어 있는 이웃,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 대상에 제한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오해는 예수님의 많은 비유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서도 생겨나지만, 예수님의 많은 비유가 아무리 온전하게 이해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의 사람됨에서 생겨납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 주저 앉은 그 바닥에서 사람의 반복되는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사람됨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야 했던 십자가, 도대체 불가능한 사람의 회복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거기입니다.
사람이 빗나간 그 자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그 여정에서 사람의 진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대를 통해서 반복되는 범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때에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대가를 치르게 하시고 응답하십니다.
더 이상 생각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것 같은 일그러진 사람의 존재 곁에 하나님은 그렇게 시간을 통해서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사랑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모양으로 끌어 내려서 사람에게 충분히 유용한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사람의 눈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알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죽으셔야 만했던 그 거룩함의 이야기를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이해하거나 살아낼 방법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슬프게도 가난한 우리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해보다 크신 분입니다. 사람의 기도보다 사람의 간절함 보다 크신 분입니다. 사람이 가진 전통보다, 잘 정해진 법칙보다, 사람이 가진 신념이나 열심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모두 소진되어 버린 자리에, 사람의 지혜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평안이 생명으로 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