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믿음의 이야기
우리 믿음이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사람이 상상하거나 깨달을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에 나타나는 역설들이 그렇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사람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믿음의 자리에 갈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시작과 그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또 온전하지 못한 사람의 본성과 세월이 쌓여도 여전히 절망스러운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서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약속하신 그 회복을 사람 안에 만들어 가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읽는 것은 전통과 역사를 통해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마치 그전에 일어난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빗나가는 일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시간들이나 조상들을 통해서 익숙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전통들이 실상은 다가오는 시대에 다음세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또 빗나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은 마치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야 되는 길처럼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도 같습니다.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사람은 그 선택으로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사람은 그 온전함의 길, 수많은 선택의 상황들과 삶의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 반복해서 “화 있을 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나열하기도 어려운 그들의 왜곡됨과 비리와 부정함과 외식과 불법들에 대한 많은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 계속 될 때에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그 회복만큼, 사람이 신앙을 왜곡하고, 빗나가서 돌이키지 않을 때에 사람이 어느 자리까지 멀어질 수 있겠는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존중 받았을 것이고, 인간적으로 그들은 괜찮은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전통을 좇아서 하던 일은 귀하고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그 모양만 남아 있고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소유하게 되는 구원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일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인가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일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나은 선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선택을 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 선택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의 제사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 그 본질이 변질되었음에도 그것을 문제삼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 있습니다.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 의원은 귀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던 문둥병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세리의 기도,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드려는 혈루병 걸린 여인, 뽕나무에 올라가던 삭개오, 수많은 물고기를 잡고서 오히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던 제자, 침례요한에게 찾아가 회개의 침례를 받던 사람들이 자신이 아픈 것을 알고 있던 이들입니다.
에덴에서의 유혹과 그 선택이 사람의 역사를 바꾼 것은 그 선택의 배경에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에 대한 왜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왜곡도 그러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음성이 시작된 날 들부터 그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이 내 안에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이야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