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이저의 동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표현은 우리 안에 여러 모양으로 대화되는 사건입니다. 우리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인가 아니면 그 시대 그 상황에서만 이해해야 하는가? 화폐라는 것이 대표하는 시대경제에 대한 것인가?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의 바리새인의 질문에 에 예수님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도에 대한 답인가? 아니면 전반적으로 로마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내용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문화적차이와 정서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시도는 의미가 있는 일인가?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면서 원하셨으면 로마를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하시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지만, 물과 피를 쏟으신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전혀 그런 물리적인 힘과 관련이 없음을 짐작하게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무엇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셨는가를 보면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길을 잃은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기록에는 나오지도 않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셔서 조용한 유년을 보내시곤, 어느날 난데 없는 것처럼 세례요한을 찾아가 침례를 받으시고 시작하시는 그 일도, 한사람 한사람 제자들을 만나고 하시는 대화들도, 어떤 사회적인 혹은 정치적으로 눈에 띄는 어떤 일이 아니라 지치고 곤고한 이스라엘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바쁘든지 아니면 아무리 풍족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였을 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인 것처럼, 역사를 통해서 조상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무감각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어려웠을 것같기도 하고, 그것들에 대한 보상인지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이들이나 아주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들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나 예수님의 주변의 이야기에 지나가듯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소식이 들렸을 때에도 그들의 바램은 많이 왜곡되어 있었겠지만 여러 세대를 거친 왜곡들이 그렇듯이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삼년은 어떤 작은 변화를 가져오기 마저도 충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끊임없이 이야기하시는 너무나 작아보이는 예수그리스도는 예언된 것처럼 연한 순 같고 그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고,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고 그래서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우리를 바꾸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에게 불편한 가이사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이나, 왕의 우편이나 오른 편, 권력의 자리들에 대한 원함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보다 더 커보입니다.
예수님은 로마를 공격하지 않으셨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낮춰 보지 않으셨고, 오히려 자신은 낫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물음 안에 어쩌면 제자들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생각과 사람들의 이해에 대한 예수님의 회한이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뜻밖의 대답에 예수님은 놀라기도 하셨겠지만 이후 베드로의 행방을 보면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라고 예수님이 반응하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이 귀한 것들이 있을 때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한 가능성을 찾고 구하겠는가? 라는 것도 우리의 질문이지만, 귀한 것을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한 속사람의 요구가 있을 때에 사람은 움직이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숙제들과 갈등들 가운데서 우리의 변명은 항상 상황과 환경을 향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예수그리스도를 오히려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습성과 생각들을 꺼내어 보이며 이것을 고집하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저가 새겨진 동전들을 꺼내어 질문하는 바리새인의 또 하나의 의미일 것 같습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고 믿는 상황들이 어쩌면 내가 하나님께 향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람의 구원, 그 회복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질문이 우리의 기도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