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맡은 역할이나 위치에 따라 더 귀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가 그렇듯이 우린 여전히 특별하고 더 나아 보이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들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제사장이라는 역할이 특별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이 잘못한 것에 대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한 온전한 관점인가를 묻지도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안에 그렇게 생겨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확신시킬 만한 일련의 사건들도 일정한 규칙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한 경험들도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본인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믿는 한 진리는 더 쉽게 가려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열심을 내고 있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는 오히려 고집스럽고 악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어떠함을 감각하지 못한 욥이 고백한 것이 그것이고, 다윗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진행한 살인이 그것이고, 바울의 다메섹에서 부러졌던 것이 그것이고, 청년 관원의 포기할 수 없었던 돌아섰던 자리가 모두가 사람이 크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동일한 표현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이 구하는 진리는 크고 작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란 상대적이거나 제한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예의나 윤리나 자연법칙 같은 것들을 진리로 이해하기도 하고, 좋은 전통이나 한 개인이 지키는 덕목들도 진리처럼 이야기 되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선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선포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레위라는 족속을 선택하셔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가끔은 그 역할을 감당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땠을까를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그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세워주셨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알고 그들을 인정한다는 사실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떠한가, 그들을 그것을 감당할 만큼 특별한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 생겨나는 요구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어떤 율법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질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음성에 대해서 사람은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사람은 선함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얼마든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에 레위가 존재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을 구하는 그 자리를 끊임없이 벗어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레위의 직분을 통해서 그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생명을 걸고 대면해야 하는 그 두려운 자리에 레위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에서 그들의 삶과 전통을 지나는 동안 지켜온 그 간헐적이고 조건적인 용서와 대속의 반복 후에 영원히 사람을 만나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커다란 진리가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만남으로 오랫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많은 사람이 통곡으로 그리고 많은 눈물로 그 만남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켜진 레위의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어떤 특별함이 아니어도 레위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우리 안에 은혜로 더 기쁜 삶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