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요한이 이야기 하는 사랑

jeffreyM 2022. 12. 30. 13:50

신앙안에서 사랑하는 일도 어떤 의무나 행위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마 오랫동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건조한 사랑 이야기로 이해하게 될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보내셨던 그 삼년 동안 한두 번을 제외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의외로 거의 사용하시지 않았던 것 같지만, 예수님이 이웃과 형제와의 관계들을 언급하실 때에도 그것은 항상 속사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자 청년 관리도 그것이 행위로 이해되는 것이라, 어려서부터 다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삶이 충분하다고 여겼겠지만, 예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요구가 삶 자체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진 것을 놓고 예수님을 좇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일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중에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질문들은 그래서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습관을 좇아서 지키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익숙해져서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또한 끊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의 세상의 일과 영의 일을 이야기하는 때에 그에게 느껴지는 안타까움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는 일과 대조되는 아닌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이에서 그가 가진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은 세상의 일입니다. 세상의 좋은 가치들에 대한 언급들이 믿음의 사람에게도 더 설득력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신앙안에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은 모양은 비슷하지만 여전히 다른 본질을 가진 것들임을 사도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라는 권고를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유가 되고, 그것이 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화목의 십자가, 그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지키고 있는 많은 신앙의 내용들 중에서도 어쩌면 익숙하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질문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지식이든지 아니면 재물이든지 우리는 항상 지키는 데에 바쁘고 거기에 대한 도전에 대해 반응하는 데에 더 바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이 믿음의 내용 안에서 어떤 것을 향하고 있는 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사도의 권고를 앞에 하면서도 우리가 익숙한 이해의 내용을 가지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고, 그 청년 관리처럼 구원에 대한 질문을 했으면서도 예수님의 요청에 대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선택을 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청년 관리의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서 사람이 원하는 확신이나 편리함이나 익숙함 같은 것들은 사람을 믿음의 자리에서 아주 멀리 돌아가게 하기도 합니다. 요한사도의 이야기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랑과 하나님과 아들과 온전함이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일이 결코 나의 어떤 행동이나 의무나 책임 같은 의미로 제한되지 않고 그렇게 이해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형제를 미워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 안에 거한다는 표현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세월이 갈수록 거대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빗나가기 쉬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요한사도의 글에서 안타까움이나 간절함이 보여지는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