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루 1952
죽음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해될까? 죽음이라는 사실이 사람의 어떠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한번은 죽는 것인데, 죽을 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힘들어 하고 자살할 생각도 한다. 왜 자살을 생각하는가 하는 것도 질문해 봐야 하겠지만 자살이란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다른 이해를 요구한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신앙의 관점이든지 아니든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죽음이 가까이 찾아왔을 때에 그것을 절망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혹은 긍정적인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것이 만약 지금껏 삶과 전혀 다른 모양을 추구하게 된다면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회한의 길로 갈 가능성이 많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죽음은 손님처럼 모두의 삶에 찾아온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후회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가? 살아 있는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후회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일까?
열심히 살아왔던 것을 후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히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충분한 인생은 없을까? 스스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선택하고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여전히 그것은 사람의 선택이 아닌가? 죽음이란 항상 사람의 인생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까이 왔을 때에 사람은 인생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은 웬일인가? 오히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그리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일은 사람의 죽음을 포함한 전 인생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인생의 노예.” “암선고를 받고 나서 비로소 살기 시작한 사람”
당신의 별명은 “송장(Mummy)”: 어떤 사람을 한 단어로 소개할 수 있는 것인가? 죽은 아내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 자신의 관점에서 직선적인 표현들을 해대는 며느리,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궁상 맞도록 성실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한 아들, 많은 인생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듣고 알게 되는 것은 어차피 사람이란 자신이 가진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선택하며 살게 되어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선택과 부딪힐 때에 사람의 선택이란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 것인가를 경험한다. 고집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인생에서 주장하지 않으면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이란 최선이 아닌 차선이라고 여겨지는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들이 있을까?
어린 여자아이와 보내는 시간동안 “단 하루만이라도 너처럼 살고 싶은데” “난 매일 일하고 먹기만 하는데.”라는 대화에서 그가 잠시 부러워 하게 되었던 자신과는 상반된 인생에 대한 관점들이 있지만, 여전히 그것 자체로는 이게 가까와진 죽음이 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후에 고위 공무원들이 와다나베씨의 장례식 장에서 술을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들 중에, 그 여자아이와 보낸 시간을 달콤하고 짜릿한 순간들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실제 두 사람이 보낸 시간들과 그들의 나누는 대화는 아무런 연결도 공감도 없는 시간들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와 성격의 두 사람이 대조되어 있을 뿐이다.
사람의 가진 가치관과 선택은 이라는 것은 우리 신앙의 내용안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와다나베는 그의 아내가 죽은 후에 혼자 산다. 독자 아들을 그의 온 사랑을 다해서 키우지만 그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 혹은 그의 혼자 사는 삶이 어떤 모양인가는 여전히 평가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선택과 그의 최선은 항상 그 본인의 몫일 뿐이다. 누구를 설득할 방법도 다른 누구에게 의미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율법이란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악함이 항목들에 포함되지 않는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이 가진 가장 큰 한계인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을 어긴 사람도 아니고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가 병을 발견하기 전에 살았던 것이 틀린 삶이라고 말할 수도, 그 이후에 그가 여러 부서들과 함께 공원을 만든 의미있는 일이 그가 한 유일한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살아가는 일이란 스스로 의미있다고 믿는 일들을 선택하며 최선을 다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공장에서 반복되는 일일 수도 있고, 공무원으로 평생 비슷한 일들만을 처리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가에 따라서 인생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거의 없다.
그가 고민의 과정을 지나갈 때에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의 갈등: 사람들은 그가 가진 상황들과 그의 삶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아무 생각이 없이 자신의 세계에 갇혀 신나는 일을 찾는 그 어린 여자아이를 보면서 주인공이 다른 관점들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뿐이다. 만약에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스스로 지식과 기술을 쌓아가는 일 그리고 그 지식으로 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에 제한되어 있으면, 사람의 대화란 누가 더 많이 알고 있으며 누가 더 잘하는가하는 문제에 제한될 뿐이다. 이미 삶을 나누는 것으로의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영화지만 거기에 한국 사람들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우리 대화 중에 많은 부분이 듣는 일을 포기한지가 오래되어서 나눔이나, 공감, 긍휼이나 함께 웃고 즐거워하는 일보다, 평가와 선택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작은 의견의 차이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와다나베씨의 외로움은 그가 어떤 이유로든지 소통이 끊겨 있다는 사실이다. 아들과도 며느리와도 그가 일하는 시청의 직원들과도 다른 부서와도 그렇다. 업무를 위해서 필요한 소통마저도 끊겨져 있다는 것이 그가 공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뛰어다니며 협조를 구했던 모든 부서의 반응에서 짐작해 낼 수 있다.
이 영화는 인생의 말련에 심기일전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한 영웅의 이야기는 분명히 아니다. 후반에는 와타나베씨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보다 그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어떤 것들이 도전을 받았는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는 기관이 가진 여러 불합리와 공무원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하고 여러사람들의 마음을 얻지만 그가 선택하고 행한 것들은 여전히 그의 선택이다. 그는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마지막 삶의 시간들을 이용해서 완성했던 공원이다. 만약 영웅이 어떤 일을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를 구하게 한다면 그는 영웅이다.
주인공의 선택과 그의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은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오히려 더 큰 것이다. 우리 중에는 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라는 자조도 있고,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라는 체념같은 것도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바울사도는 그가 아는 한 자신의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조상들이 지키던 하나님, 그것에 대한 도전하는 이들을 고발하고 처벌하는 자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은 그에게 있어 천지가 개벽하는 경험과 같은 것이었다. 민족신앙에 도전하는 크리스챤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에서, 생명을 걸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죽음의 자리까지 경주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은 다양한 현대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깊이는 분명히 아니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 충분한 것처럼 선택하고 행동한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과정중에 시행착오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남기게 되어 있다. 믿음의 문제는 선택이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관계의 문제였다. 히브리서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도 믿음의 장에서 언급되는 이들의 행동이나 선택의 문제로 접근하면 믿음이라는 것을 이해 할 방법이 없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셔서 어디까지 가게 하시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사람은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깊어가는 그 관계, 믿음을 갖게 된다.
나도 주인공처럼 단조롭고 건조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롭게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하는 것은 영화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 하는 바도 아니다. 물론 영화 하나를 감명 깊게 보았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있다. 문제는 우리가 눈을 떠서 그것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사사들과 왕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는 것은 그 배경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엉망인 것 같은 시대적인 상황에서 속삭이듯 작은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람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순간들은 아주 많이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르기에 충분한 조건이나 상황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인정하는 가와 관계없이 세상을 만드시고 지키시는 살아 계시는 분이다.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동기가 된 와다나베씨의 전환은 귀한 일이고 좋은 영향들을 사람에게 끼친다. 우리의 질문은 죽음이라는 것이 끝이 아닌 거대한 믿음의 내용 안에서 영원이라는 세월을 쌓아가는 우리에게 와타나베의 삶보다 더 귀한 것으로 오늘 하루를, 남은 인생을 대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