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우리의 광야

jeffreyM 2022. 6. 23. 02:03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별했음을 가정할 때에 우리에게 지나쳐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전제가 거기에 함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행하는 일은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변명을 사람이 얼마든지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중에 우리의 많은 변명들이 실상은 거기에 속하기도 합니다.
또 성경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특별한 일이지만, 그이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다르지 않다는 것 어떤 경우에는 더욱 형편이 없음을 발견할 때에 우리의 묵상이 그 모순을 피해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의도있는 거짓으로 블레셋 왕에게 신뢰를 쌓아 갑니다. 생존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민족 유다와 싸우는 자리에서 블레셋 왕과의 대화는 다윗이 그의 마음을 얻었음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윗의 반응입니다. 자기 민족과의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다윗에게는 분명히 잘된 일이지만 그는 그사실에 오히려 흥분하면서 아기스 왕이 자신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이 가진 거짓이 탄로날 즈음에 과한 반응으로 그것을 방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좋은 의도였던 아니든지 사람은 그 길을 자주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성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다윗에 대한 표현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다윗의 이러한 모순된 모습은 필요라는 것으로 정당화 될 수 있겠습니까? 
살아야 했기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 소개하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의 형에게 한 사기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살려준 기생 라합의 부탁도, 룻을 위해 숨은 의도가 있는 회의를 소집했던 보아스에게서도 보는 것과 같이, 그들의 그 사건들로 인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을 이어가시지만, 보기에 따라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아야 하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이 지나갔던 그 세월을 통해서 어쩌면 다윗은 돌팔매를 들때의 당당함이나 사울보다 많은 수의 적군을 죽인 자랑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특별하지 않음을 깨닫는 때 말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시들을 읽으면서 돌팔매를 들고 돌진하는 다윗을 상상하거나 능숙하게 싸우는 용사 다윗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윗의 찬송은 항상 여호와가 일하심에 대한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에 빼앗겼던 하나님의 법궤를 백년이 지난 후에 되찾아 돌아올 때 그가 추던 춤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진심이었는지 시편의 찬송에 비추어 짐작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련에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다윗의 태도가 이상하리만큼 소극적이고 겸손한 것도 평생을 통해 그가 가진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이해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자랑도 사람의 특별함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음을 깨닫기까지, 이스라엘의 40년처럼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세대가 바뀌는 동안 광야에서 방향없이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이 어린시절과 용사일 때와, 사울에게 쫓기던 때와 블레셋에 숨어 살던 때와 사울이 죽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있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지키시고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과 또 믿음의 길을 갔던 많은 선진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도 주인되심을 또한 깨달아 알아감이 우리의 시편에도 깊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