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믿음
구원자가 자기 민족 가운데에 찾아오셨는데 니고데모나, 노인 시므온이나 안나 선지자와 같은 반짝 등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어떤 정치적인 이해나 사회적인 관점으로 대합니다.
우리시대에도 신앙을 나누는 대화나 표현하는 대화들이 그것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두 세사람이 모여서 신앙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이야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맇게 묻는 질문이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러한 질문 중에 오히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처럼 찾아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선택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사람이 성경을 읽는 데에 초점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기에서는 사람의 교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의미가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다른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이 빗나간 질문들은 그 대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하기도 하고, 더 근본적인 문제 하나님이 사람을 왜 그러한 방법으로 지키기로 하셨는가? 그러한 하나님이 사람의 존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을 수 없게 하므로 해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신앙안에서 깨달아 가야 할 것들과 그래서 움직이게 되는 많은 많은 동기들은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향해 가는가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방법과 그것들을 지키는 것으로 사람의 존재를 대신 할 수 가 없고, 사람의 행복이 그렇듯이 어떤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존재하는 배경처럼 살아가는 일에 함께 있게 되는 일이 믿음의 일입니다. 그것이 새생명의 의미이고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이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며 이야기 하셨던 몸과 피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자신의 어떠함의 배경과 무관하게 행동하고 처신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칭찬받고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서기관이나 대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사람 가운데에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가? 만족함을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사람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믿음 안에서 사람에게 만족함이라 상황과 무관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과연 그 자리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질문이 되는 것은 여전히 사람 안에 사람의 소유로 쌓여가는 어떤 것으로 믿음이라는 것이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함이나 부요함이 사람에게 차이가 없다면 그때에 만족감이란 사람에게 있는 사람이 소유한 어떤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도 그 양의 어떠함이나 드라크마의 가치에 대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초점은 항상 양을 찾고 돈을 찾은 주인이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그 존재의 의미와 행복을 사람의 자리, 사람이 있었던, 그리고 있어야 할 자리,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신 그 회복된 관계 안에 있는 자리라고 생각할 때에 사람의 믿음은 사람을 살게 하는 복된 생명의 소식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사람이 소유하게 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값없이 사람이 처하게 되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아마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신의 가리워진 눈과 막혀 있는 생각들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날 때 부터 소경된 자가 보게 되면 그는 보게 되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 눈 뜬 후의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일이 더 큰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만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전보다 나은 것이나 사회적인 가치로 좋고 옳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배경이 바뀌어버린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다시 세우고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세월이 쌓여가면서 여러번 겪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믿음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쌓여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수고 다시 세워가야 하는 일과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진 지식의 원리나 내용이 사람이 가진 믿음의 배경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믿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무너지거나 자신의 약함으로 실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그를 세우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어떤 행위로도 믿음은 알 수가 없고, 어떤 방법이나 원칙으로도 믿음은 정의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 가운데에 그것이 어려움이든지 기쁜 일이든지 아무리 희미해도 사람을 불러주셨고, 사람이 돌이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음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사건인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