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그 같은 자리

jeffreyM 2022. 3. 13. 00:10

당시의 지도자들을 향한 강한 표현, 예수님의 단호한 표현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만족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만, 예수님의 야단치신 일은 지금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잘못한 다른 사람이 야단을 맞는다고 해서 사실은 내게 좋을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당시 사두개인의 모습이나 서기관들의 모습에 대해 비판의 시각을 가질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나의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 비판할 수 있는 “공감”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고 그 같은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사람,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작아 보이는 그 차이를 하나님은 의로 여기십니다.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가진 삶의 모습은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 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선지자 시대를 지나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사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스라엘이 어떻게 변질되고 왜곡되어 왔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세번 세대가 바뀌면 사람은 이전 세대의의 전통이 가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백년은 참으로 오랜 세월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채 한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른 가르침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리 역사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때 함께 살던 이웃이 나를 고발하고 괴롭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으면 우리는 아주 가벼운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믿는 자리에 가기가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란 사람에게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이 없다는 절대적인 자기 존재의 인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조금 부족하거나 덜 하거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으므로 갖게 되는 그것은 사실 사람의 겸손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어떻게 겸손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란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자랑이나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의 그 자리를 알게 되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이야기는 항상 자랑이나 수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크심과 사람의 작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삶이 감사하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하는 삶의 내용으로 예수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