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자리
결국 백마리의 양 중에 일어버린 한마리의 양이나 열 드라크마를 가진 사람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이야기는 백분의 일이나 십분의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셈입니다. 부모에게 더 마음이 가는 아이는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도 그것이 차지하는 숫자적인 비중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대개 어떤 이야기를 숫자로 이야기하게 될 때에는 다른 평가의 기준이 없을 때 혹은 다른 것으로 이야기할 수 없을 때입니다. 가끔 사람이 참으로 가난한 자리에 가게 될 때에 그것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이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수군거리는 중에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한마리 양과 한 드라크마와 작은 아들의 비유도 같은 이야기 인 이유는 그 관계가 끊어졌던 자리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구원을 누리는 일이 부요하고 의미있음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기준으로 허용되지 않는 다른 이들의 구원의 모습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기준이 존재하겠습니까?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멸망으로부터의 생명으로 옮기신 은혜가 우리 인생이라면, 그것이 비교될 수 있는 다른 일이 인생 가운데에 있겠습니까?
큰 아들의 불만은 자신이 속한 자리,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가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과 공평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우리가 현재의 인생과 삶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은혜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테면 아무리 낮은 곳으로 여겨지는 데에 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혹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큰 아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재산을 받아서 탕진해 버린 아우가 받아야 할 대우가 달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어떻게 대하는 가가 큰 아들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큰 아들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아버지와 살아가고 있는 그 자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동일 한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 삶의 자리가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설령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마땅한 대가를 받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 할 때에, 혹은 괜찮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에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삶의 귀함 안에서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흔아홉 중에 하나일 때 다시 찾은 한마리양으로 심하게 기뻐하는 주인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내가 만약 성실히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큰 아들일 때에 재산을 다 소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크게 환대하는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면 길을 잃은 양보다 잃지 않고 있는 아흔 아홉의 양이 더 괜찮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길을 잃은 경험이 없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작은 아들은 가서 아버지에게 종이라도 되서 먹을 것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돌아옵니다. 큰 아들은 거기에 비할 수 없이 복된 자리에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우리는 공평함이나 공정함의 언어를 내세워서 실제로는 사람이 원하는 것들에 대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귀한 것임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원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은혜의 내용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감당하셨고, 우리 안에 끊임없는 갈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경주하는 자와 같이 삶을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흔적으로 인해서 잠시 사람이 머무르게 되어 있는 자리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잃었다가 찾은 양, 다시 찾은 한 드라크마가 기쁨이 되고, 살아서 돌아온 아우가 아버지에게 처럼 내게 행복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