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과 같이
열심을 내는 것 자체가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악한 것을 위해서 열심을 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들고 있는 일 자체가 가치로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청지기의 비유는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한다라는 말씀 뒤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혼인 잔치에 간 주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 주인이 더디 올 수도 있고 일찍 올 수도 있지만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어떻게 하겠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사회에는 종들 중에 주인으로 부터 다른 종들을 맡아서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종들을 때리고 술에 취하기도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승에는 주인이 모든 재산을 맡기는 지혜로운 종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등장합니다. 맡은 자 중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도 합니다. 말씀은 부지런함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는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중함을 모르는 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여전히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확인과 겸비하는 일보다, 빗나간 종처럼 주인이 아직 집에 오지 않았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웃을 악하게 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습관처럼 행하는 좋은 행위가 있으면 괜찮을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상처가 주는 말과 행동을 한다고 해도 스스로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그 대상이던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못박히신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짐작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의외로 직접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적이 없지만, 단 한번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서로 사랑할 것에 대해서 요구하셨던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했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건도, 여러 비유로 말씀하신 사람의 구원과 생명의 이야기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만나주셨을 때까지 제자들은 온전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야기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열심이나 맡은 일을 충분히 해내는 능력 같은 것, 충분한 작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 등장하는 종처럼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하고 먹고 취하고 다른 종들을 때리는 일과 같은 빗나간 일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구원되심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가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나 방탕한 일은 점점 불가능한 일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역설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속성에 대한 절망과, 그 보다 큰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하는 중에 오히려 더욱 누릴 만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r2luke1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