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가질 수 있지만, 여러 인격을 의미하게 되는 건 아니지. 그래서 역할에 따라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이상해 보이는 거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내가 알고 살아가는 배경이 바뀌는 셈이니까, 사람의 삶에 그 배경은 반영되게 되어 있지.
그래서 믿음은 극적인 변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안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이해, 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사람의 형질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근사한 옷인데 익숙하지 않은 그낌? 정말 맛있는 음식인데 나의 음식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하고 비슷할까? 내가 익숙했던 것이 불편하고 나의 나됨에 대해서 희망을 갖게 되는 그런 느낌일까?
그래서 회의적인 것 같은 우리의 질문은 항상 우리의 일상에 대한 거야.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쉽게 감각할 수 있을 만큼 실제적이지가 않거든. 사람의 사람됨으로 인해서 온전하게 볼 수 없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하니까. 만약에 믿음을 신뢰라는 면에서 이해한다면,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성경의 비유처럼 말이 안되는 거야.
그래서 믿음을 가졌으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실망하는 사람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고 그 사도의 많은 편지가 말하는 거야. 그래도 괜찮다구.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은혜 인거라고. 사람은 그 안에서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거라구.
절망이 반복되면 그것이 어떤 근거였던지 간에 삶을 유지할 만한 이유도 가치도 없어 보이거든. 더 지속할 힘도 없어지는 거구. 사람은 결국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는 거니까.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일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어 가는 거지.
처음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대하지. 특별한 것들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을 자랑하기도 하고, 특별한 상황을 구하기도 하지.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믿음의 표현이 사람을 향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지. 하나님을 향하는 나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니까 나는 하나님 안에서 지나가는 내 일상이 하나님의 영광인 셈이야.
내가 소원하는 것들이 믿음의 내용도 아니고, 내게 주어지는 좋은 것들이 믿음의 증거들도 아닌거니까. 믿음은 바뀐 본질 때문에 사람이 향하고 구하는 것이 달라지는 거야. 그래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소중해 지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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